과학이론은 진리일까? 도구일까? 과학 이론의 정체성을 둔 토의는 지금까지도 활발히 이어집니다. 오늘은 “과학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진리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라는 말로 비판적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사상을 전개한 3세대 헬싱키 학파 철학자 일카 니닐루오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우리는 과학이 ‘진짜’ 세계를 설명한다고 믿습니다.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전자, DNA, 블랙홀이 단순히 계산을 위한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더라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일까요? 과학 이론이 단지 현상을 예측하기 위한 편리한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철학자들도 많습니다.
이 치열한 ‘실재론 vs 반(反)실재론’ 논쟁의 한복판에서, “과학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진리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변호한 위대한 핀란드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헬싱키 학파’ 3세대를 대표하는 일카 니닐루오토(Ilkka Niiniluoto, 1946~)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가 어떻게 ‘비판적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정교한 이론을 구축했는지, 그의 생애와 핵심 사상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1. 헬싱키 학파의 황금기를 이끈 일카 니닐루오토
일카 니닐루오토는 핀란드 철학의 황금기를 이끈 ‘헬싱키 학파’의 계보를 잇는 핵심 인물입니다.
- 헬싱키 학파의 3세대: 폰 브리트(1세대), 야코 힌티카(2세대)의 뒤를 이어, 그는 헬싱키 학파의 논리적 엄밀함과 분석철학의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 학자이자 행정가: 그는 헬싱키 대학교에서 철학, 수학, 물리학을 공부한 수재였으며, 훗날 모교의 철학과 교수를 거쳐 헬싱키 대학교 총장(Rector/Chancellor)까지 역임하며 핀란드 지성계를 이끌었습니다.
- 주요 관심사: 그의 주된 철학적 관심은 ‘과학철학’과 ‘인식론’이었습니다. 특히 “과학은 진보하는가?”, “과학 이론은 실재 세계를 얼마나 반영하는가?”라는 질문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2. 실재론 vs 반실재론 과학 철학의 영원한 논제
니닐루오토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이 논쟁의 구도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2.1. 과학적 실재론 (Scientific Realism)
- 핵심 주장: “우리가 현재 받아들이는 최고의 과학 이론들은 (대략적으로) 참(True)이다. 이론이 말하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전자, 쿼크 등)은 실제로 존재한다.”
- 근거 (기적 불능 논증): 만약 전자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이론이 거짓이라면, 과학이 이토록 정확하게 예측하고 성공하는 것(예: 스마트폰, GPS)은 ‘기적’일 것이다. 과학의 성공은 이론이 실재를 반영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2.2. 반실재론 (Anti-Realism / 도구주의)
- 핵심 주장: “과학 이론은 ‘참’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유용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질 뿐이다. 이론은 현상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 근거 (비관적 귀납): 과거에 ‘절대 진리’로 여겨졌던 과학 이론(천동설, 플로지스톤, 에테르)이 모두 폐기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는 이론도 언젠가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론이 ‘참’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3.’비판적 과학적 실재론 (Critical Scientific Realism)’
일카 니닐루오토는 이 양극단의 주장을 모두 비판하며, 더 정교하고 합리적인 ‘실재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비판적 과학적 실재론’**입니다.
3.1. 왜 ‘비판적(Critical)’인가? : 오류가능주의의 수용
그는 반실재론자들의 ‘비관적 귀납’ 주장을 정면으로 받아들입니다.
- ‘소박한 실재론’의 거부: 그는 “현재 우리 이론이 100% 진리다”라고 말하는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을 거부합니다.
- 오류가능주의 (Fallibilism): 니닐루오토는 “우리의 과학 이론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오류가능주의’를 실재론의 핵심에 포함시킵니다. 과학자는 진리를 추구하지만,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인정해야 합니다.
즉, 그의 ‘비판적’ 태도는 과학적 지식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독단주의를 경계한다는 의미입니다.
3.2. ‘진리 근사성 (Truth-likeness / Verisimilitude)’
그렇다면 “이론은 틀릴 수 있는데, 어떻게 실재론을 옹호할 수 있는가?”라는 딜레마가 생깁니다. 니닐루오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 포퍼(Karl Popper)가 처음 제시한 ‘진리 근사성’ 개념을 논리적, 수학적으로 정교화합니다.
- ‘참’과 ‘거짓’의 이분법을 넘어서: 과학은 ‘완전한 거짓’에서 ‘완전한 참’으로 한 번에 도약하지 않습니다.
- ‘진리에 더 가까워짐’: 과학의 진보는 ‘진리 근사성’의 증가 과정입니다.
- 예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보다 뉴턴의 물리학이 ‘진리에 더 가깝습니다’.
- 그리고 뉴턴의 물리학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진리에 더욱 가깝습니다’.
- 진보의 정의: 비록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미래에 수정될지라도(오류가능성), 과학은 분명히 ‘진짜 세계(Real World)’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을 향해 진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 근사성’ 개념이야말로, “이론은 틀릴 수 있다”는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과학은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는 실재론의 핵심을 지켜내는 니닐루오토 철학의 심장입니다.
4. 다른 핀란드 철학자와의 관계
니닐루오토는 헬싱키 학파의 선배 핀란드 철학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 **폰 브리트 (G.H. von Wright)**와 **힌티카 (Jaakko Hintikka)**가 ‘의무 논리’, ‘인식 논리’ 등에서 보여준 엄격한 논리적 분석 도구를, 니닐루오토는 ‘과학철학’이라는 영역에 적용했습니다.
- 그는 ‘진리 근사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감상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확률 이론과 논리학을 사용해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는 헬싱키 학파의 ‘논리적 분석’ 전통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입니다.
5. 니닐루오토의 실재론 의의
일카 니닐루오토의 ‘비판적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은 완벽하지 않지만, 우리가 가진 최선의 진리 탐구 도구”라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합니다.
- 독단주의와 회의주의 사이의 길: 그는 “과학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한 독단주의와 “과학도 결국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회의주의(혹은 포스트모더니즘) 모두를 거부합니다.
- 현대적 의의: ‘가짜 뉴스’와 ‘탈진실’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과학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위대한 핀란드의 철학자 일카 니닐루오토는 “그렇다, 객관적인 진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과학이라는 등불을 들고 그 진리에 겸손하게, 그리고 비판적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강력한 철학적 답변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